다음은 어느 포털사이트에서 ‘오행설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이다.’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어떤 네티즌 (Naver ID: charmdae)의 글입니다.
우선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물이 있고 이 사물들의 속성이나 형태는 그 사물의 특성에 따라서 각각 2분, 3분, 4분, 5분, 6분 등등 여러 가지 범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음양오행설은 이 모든 사물들의 구분 범주를 오직 음양이라는 2분법이나 오행이라는 5분법에 의해 갈라놓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비과학적이고 일률적인 방식으로 흡사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적당히 늘이거나 줄이는 인위적 조작의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됩니다.
아주 쉬운 예를 든다면 <방위>는 보통 동서남북의 4방으로 구분합니다. 그런데 5행은 이를 5개의 범주로 구분해야 하므로 중앙이라는 방위를 만들어 채웁니다. 또 계절은(그나마도 이는 온대에나 해당하는 구분인데도) 4철이라 하여,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구분하는 것이 보통인데, 5행에 맞추기 위해 [4계]라는 것을 억지로 만들어 토(土)부에 넣어 5등분합니다.
천간(天干)은 다행(?)히 10종이라서 다섯 가지로 균등히 나누어지므로 2종씩 사이좋게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지(地支)인 12지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불가능하자 다른 것은 다 2종씩 나누어 넣고 진술축미(辰戌丑未) 4종은 토(土)부에 한꺼번에 밀어 넣습니다.
색(色)의 기본은 3원색입니다. 흑색은 모든 색을 가합한 것이고 백색은 그 반대입니다. 그런데 5행에서는 동일한 자격으로 각각 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인체를 5행에 맞추기 위해 어깨(肩)/ 가슴(胸)/ 다리(足)/ 머리(頭)/ 배(腹) 등으로 구분해서 집어넣은 것을 보면 실소를 금할 수 없습니다. 팔은 어디로 갔을까요? 둔부는?
동물 분류, 인간의 감관 분류, 하루의 시간 배분 등 일일이 거론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이상스러운 구분을 시도하는, 이러한 것이 바로 5행입니다.
오래 전부터 사주, 궁합, 명리, 운세와 같은 점복(占卜)술에서는 생년월일, 숫자, 방위 등을 오행으로 분류함으로서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예지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여 왔습니다. 오행론을 처음으로 정리한 제나라의 추연(騶衍)이라는 학자도 오행의 의미를 자세하게 설명하기 보다는 분류를 위한 체계로서 활용하였습니다. 그는 오행의 덕을 제왕들에게 배당시켜서 왕이 되었다는 설을 내세웁니다. 그 이후로도 오행론은 중국의 주역과 도가의 사유들과 뒤섞이면서 매우 복잡한 분류체계를 만들어 놓게 됩니다. 결국, 주변의 모든 대상들을 강박적으로 분류하는 시도는 오행론을 일종의 신비주의적인 분류체계로서 고착화 시키고 맙니다.
위의 네티즌은 바로 그러한 작위적인 분류체계의 허구성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요, 홍대용(1731-1783)이라는 조선시대 실학자 역시 이와 똑같은 맥락에서 오행론을 비판하였지만, 위의 네티즌의 글이 더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홍대용의 글 대신에 발췌해 보았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오행론에서 뿐 아니라 서구의 4원소론에서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전개된다는 사실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학자 아그리파(Agripa)는 우주가 사원소를 내포하고 있기에 우주와 심지어는 인간의 모든 것이 사원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인간의 체액은 흙담즘은 흙, 황담즙은 물, 혈액은 공기 담은 불과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하거나, 식물의 뿌리는 흙이고, 잎은 물, 꽃은 공기, 씨는 불에 해당한다는 식으로 주장합니다. 중세유럽의 어느 귀족은 귀족, 성직자, 부르조아, 농부와 같은 유사 원소가 존재하기에 엄정한 정치적인 분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일부의 예일 뿐, 오행론과 마찬가지로 4원소도 서구유럽에서 세계를 분류하는 기본적인 체계로 사용되었습니다.
바슐라르는 이에 대해서 ‘광란의 우주론’, ‘어리석음’, ‘환각’, ‘수인식의 원초적인 유혹에 이끌린 산수의 소아증’이라는 원색적인 비난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 지배는 무절제한 합리주의의 표지’이며. 즉 ‘명확성에 대한 일종의 열광과 온 우주를 하나의 통일된 방법에 끼워 맞추려는 초인적인 희망에 복종하는 합리주의의 표지’라고 평가합니다. 여기서 합리화(rationalisation)는 합리성(rationalité) 과는 정반대로, 거짓을 진실로 믿게 만드는 비이성적인 과정을 말합니다. 물론 상상력의 철학으로 전향하기 이전에 과학철학자로 머물러 있을 무렵의 발언이고, 오히려 이후에는 정신의 4가지 분류의 법칙을 스스로 정립하는 데에 앞장서지만, 전통적인 4원소론의 분류체계에 대한 불신은 그 이후에도 여전했습니다.
저 역시, 전통적인 오행론에서의 작위적인 분류방식은 반대합니다. 분류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 분류하는 방식의 타당성이 매우 부족합니다. 특히 길흉화복을 예지하기 위한 주역이나 사주팔자, 명리학에서 오행론을 끌어다 결합하여 사용하는 방식은 지양되어야 할 어리석은 허구라고 봅니다. 오행론은 한자의 획수나 생년월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주역과 결합하기 이전에 추연이 독자적으로 제시한 오행론은 그 이론을 설명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도식적인 분류를 사용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류에는 전혀 진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홍대용과 바슐라르의 비판은 절반의 오해와 절반의 진실을 포함합니다. 오해의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하게 설명하겠지만, 우선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기존의 오행론이나 4원소론에는 그 물질들의 의미를 충분하게 파악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그렇게 의미를 확장시켜 적용하는 과정에 대하여 충분하고 개연적인 설명은 거의 없고, 대개가 단정적이고 일방적인 설명에만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즉, 분류체계가 직관적 사유에 의해서 성립되었다면, 직관에 의해 밝혀진 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오행이 가지는 의미에 의하여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분류되어야 하기 때문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행과 결합한 주역 및 사주의 원리는 이러한 강박적인 분류체계를 더욱 부채질하고 맙니다.
어떤 초월적인 지식의 권위자가 마치 ‘내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그것은 그런 것이다.’라는 듯이, 단정적이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방식은 우리에게 더욱 많은 의문과 비판을 만들게 합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다섯 가지 범주로 사물들을 나누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득적인 설명이 없습니다. 오직 옛 성인이 그렇게 말했고, 지금까지 선조들이 오랜 동안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관습적인 근거뿐이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이천여 년 전의 이해 및 기술 방식이 현재에도 거의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점 역시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서 서구에서는 인식론(epistemology)이라고 하는, 지식의 탐구 방법 그 자체를 묻는 학문이 발전해 오면서, 어떻게 앎을 추구하는 방식을 정당화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깊은 반성적 사고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지식의 탐구 과정 자체가 철학과 사상을 통해서 끊임없이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동양에서는 문제제기 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지요. 오히려 서구의 철학자들의 인식론적 성찰을 통해서, 동양의 사유체계에서의 인식론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행론의 전통적인 접근 방식의 한계점은 또 다른 동양의 사유방식의 특수성에서 비롯됩니다. 동양의 사유방식에서는 인식하는 자와 인식하는 대상, 지식을 가진 자와 지식 그 자체를 서구의 데카르트의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처럼 엄밀하게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지식은 인간의 주관성과 분리되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바라보는 사람을 통함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됩니다.
그 결과, 아무런 회의 없이 무반성적으로 기존의 지식을 생활세계에 적용함으로서, 생활세계에서의 주체의 능동적인 의식으로 부터가 아니라, 반대로 외부의 정형화된 지식을 생활세계에 적용하는 방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현상학에서 경계하는 선입견이자 독단주의이기도 합니다. 최근까지도 동양에서의 지식은 지식인의 권위와 결합된 도그마(dogma)적인 성격이 강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옛 성인의 가르침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고를 한다는 것은 성인의 권위를 부정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지요. 비판과 논쟁을 통한 반성적 사고가 허용되기 어렵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점에 대해서 확실히 부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따라서 전통적인 오행론의 접근방식은 현대인에게 더 이상 설득적이지도 않거니와, 학문적인 수준에서도 시대에 걸 맞는 보편적인 지식으로 발돋움하기에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결과적으로 전통적인 접근방식은 오행론을 고대의 신비주의적인 가설로 치부하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보다 근본적인 물음은 ‘우리는 어떻게 오행에 대해서 알 수 있는가?’ 에 대한 것입니다. 전통적인 오행론의 방대한 분류 체계를 습득하는 것보다도, 어떻게 오행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한 메타적인 수준의 질문이 먼저 해결되어야 합니다. 오행론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오행론에 대한 교조적인 믿음을 과감히 깨부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출처] 오행론을 통한 사주팔자의 허구|작성자 김박사
'명리의 역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주/ 남구 사주 카페 도혜] 명리학의 근본원리 (0) | 2018.05.10 |
---|---|
[광주/남구 사주 카페 도혜] 월률분야, 인원사령 (0) | 2018.04.21 |
[광주/남구 사주 카페 도혜] 용신 무용론 (0) | 2018.04.17 |
[광주/남구 사주 카페 도혜] 사주 공부해 보니, 이런 역술가는 99% 사기꾼 (0) | 2018.04.02 |
[광주/남구 사주 카페 도혜] 역술인의 거짓말 (0) | 2018.04.02 |